악몽 2
새벽에 그 글(엘리베이터의 악몽)을 쓰고 나서 갑자기 화장실 전구가 파삭 하고 나갔다. 글을 쓰려고 장면 장면을 떠올리면서도 제법 무서웠는데 불이 나간 것은 정말 적절한 타이밍이었음.

낮엔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다녀왔다. 어느정도 나이가 되면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으러 다니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여러번 듣긴 했지만 그동안 부인과 계통의 병원을 갈만한 특별한 이상을 느껴본적이 없었는데, 마침 경미한 이상이 생긴 김에 겁도 나고 해서 학습차 한번 다녀와 보기로 했던 것이었다.

병원은 인터넷에서 알아봐 둔 동네 병원이었는데, 조금 걱정했지만 다행히 내가 갔을 때는 환자가 별로없어서 '저 학생 무슨일이지?!' 하는 시선집중은 피할 수 있었다. 이름이나 주민등록번호 같은것을 적으라고 해서 적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보니 간호사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조금 예상 밖의 일이었지만..

하지만 더 예상 밖의 일이었던 것은 의사가 남자였다는 것.. 사전조사도 마음의 준비도 충분히 하고 왔다고 생각했지만 충분치 않았던 것이다. 아가씨 환자니까 당연히 여의사 쪽으로 넣어주겠지 하는 것은 말도안되는 착각이었고 이제와서 '여의사로 해달라고 말해둘걸'이라고 후회해봐야..(그러나 생각해보면 나는 바로 이때 "죄송하지만 여의사로 바꿔 주세요"라고 외쳤어야만 했던 것이다. 지금은 이미 후회해도 늦었다..)

그리고 나는 200%의 구라를 섞어치는 음담패설보다 정확한 명칭을 사용하는 의료상담이 천배는 더 부끄럽다는 사실을 오늘에서야 알았다...

페르시아 백만대군에 가죽팬티 한장 걸치고 맞서는 기분으로 겨우겨우 설명을 했더니, 이번에는 한번 보잔다.(잔인한 생키..) 꼭 그래야 되냐고 묻고싶었지만 그떄의 나는 그야말로 뱀 앞의 개구리. 아마 '지금부터 배를 가르겠습니다'라고 했더라도 거역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차라리 배를 갈랐으면 다행이었을 것을.

그리하여 티비에서나 간혹 보던 공포의 산부인과의자와 들이밀어지는 전등과.. 더이상 말할 수 없는 무언가들 틈에서 억겁의 세월이 흐르고 풀려났을 때는 아.........................
정말이지,
막심한 후회밖에는..(지금 생각해도 눈앞이 깜깜하다)

병원을 나오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하소연을 했고, 다행히 그녀는 "그것은 의료행위일 뿐이야" 따위의 망발을 하지 않고 깊이 공감해 주어서 한가닥 위안을 얻었다. 내가 이 치사량의 수치와 모멸감을 주었던 경험을 굳이 포스팅하는 이유는 나로서도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의료행위일 뿐이에요"라는 리플을 받기 위해서는 아님을 밝혀두며(정말로, 그것은 의료행위일 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나는 감성적인 동물이라)

이만 총총.

잡담, 일상* 산부인과, 악몽
2007/06/04 20:20, mari.

  1. 굘님 2007/06/05 00:32 Delete Reply
    오늘부터 산부인과 의사 공부 시작[...]
    • mari 2007/06/05 16:20 Delete
      .....
      고맙다 무척 위로가 되는구나....
  2. 유제 2007/06/05 01:07 Delete Reply
    그냥 경험치 늘렸다고 생각해라.....;
    • mari 2007/06/05 16:21 Delete
      레벨 올리기 넘 힘들다 경험치쌓기가 보통일이 아니여
  3. 소희 2007/06/05 09:53 Delete Reply
    헐.......진짜 싫었겠다.
    나 아는 언니는 생리 주기가 비정상적으로 짧아서
    (약 15일마다 한번씩?)
    병원 갔는데 남자 선생이어가지고
    고등학생때였는데 진짜 수치스럽고 싫었대.

    산부인과 선택하는 남자의사들은 참....
    그래. 그치? 요즘 세상에 산부인과 별로 돈도 안될텐데;
    • mari 2007/06/05 16:40 Delete
      생리주기 짧은거 진짜 개 쉣이다;; 근데 왜 여선생 있는데로 알아보고 가지 않았다니..
      근데 생각해보니까 산부인과는 한번 정하면 보통 출산하고 산후조리까지 붙어있으니까 제법 돈이 되는거일지도 몰라. 근데 나같으면 돈 돼도 안할듯..
  4. 늑대 2007/06/05 23:25 Delete Reply
    미움받고 있다... 내거만 쏙 빼놓고 답글 달았어 ......
  5. 파반 2007/06/06 01:45 Delete Reply
    현재시간이 AM 9:40...
    컴터 책상앞에 앉아 있는시간 13시간 돌파!
    굳이 꿈을 꿔야 악몽인가요? 기말이라 밀린숙제, 에세이 작성,
    졸려 죽겠어요. ㅠ_ㅠ 졸린거 없애려고 여기서 이러고 있네요..
    근데 읽다 보니 요즘글보다 예전글을 읽다가 더 많이 웃게되는것 같네요
    그렇다고 뭐 요즘 글이 별로라는건 아닙니다. : D
    • mari 2007/06/11 01:29 Delete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저도 이제 슬슬 시험의 악몽이..
      아무래도 슬슬 소재가 떨어져 가기도 하고, 글쓰는것도 습관이다 보니 오래 안쓰면 탄력이 좀 떨어지는것같아요.
      정진하겠습니다 (__)>
  6. 낙화 2007/06/09 21:21 Delete Reply
    정말 고생했구나.;; 난 산부인과는 중학교때 딱 한번 가봤는데 그땐 여의사라..
    다음엔 꼭 여의사 찾아가(..) 화이팅<-
    • mari 2007/06/11 01:30 Delete
      다음엔 꼭 치밀하게 준비해서 여의사 있는데로;
  7. 늑대 2007/06/10 01:52 Delete Reply
    쩐의 전쟁 숭실대 나오네? ㅋㅋㅋ ...너무 반가워서 그만..
    • mari 2007/06/11 01:30 Delete
      선배 리플만 빼놓고 리리플 달았는데도 또 리플달러 오시는 선배의 그 근성 완소해요
    • 늑대 2007/06/11 01:48 Delete
      ...나빴어.. ㅠ 또 내꺼만 빼놨다 이거지..
  8. mizho 2007/07/25 11:04 Delete Reply
    나도 생리불순때문에 간 적이 있었는데, 초음파 검사를 하는데 남자의사인거야.
    정말 미친듯이 부끄럽더라.. 난 이글 정말 공감감..
    뭐랄까, 수치스럽다고 해야하나.. 난 눈물나던데 끝나고[...]
    좀 오버인지 모르겠지만;
    • mari 2007/07/28 14:00 Delete
      어 나도 울뻔했음
      진짜 앞으로 갈일 생기면 잘 알아보고 가야지 이거야 원..
  9. 쎄이씨리 2009/11/26 09:02 Delete Reply
    난 뒤늦게 갔다. ;ㅁ; 올해
    근데 간호사가 자꾸 내가 눕는데 생글생글 웃어서 기분 나빴어 ;ㅁ;
    그 때는 다 거슬리는 것 같아 흑흑
    다행히 여의사이긴 했다.
 
엘리베이터의 악몽
나는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는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약 5년 정도의 공백을 빼면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의 높은 층에 살았으니 이쯤 되면 엘리베이터에 친숙해질만도 한데. 그렇다고 내가 항상 엘리베이터에 공포를 느끼는 건 아니다. 좋든 싫든 나는 하루에 두어번은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입장이고 매일매일 그런 공포체험을 해서야 신경이 남아나질 못했을테니. 어쨌든 평소에는 괜찮지만(추락하면 어떡하나 하는 약간의 걱정 빼고) 간혹가다 견딜수없이 무서워지는 것은 꿈 때문이다.

생각해 보니 항상 비슷한 패턴이었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히고 나면, 내가 원하는 층의 버튼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버튼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다거나 우리 집의 층수만 없다거나.. 거기에서 어떤 버튼을 누르든(또는 아무것도 누르지 않더라도) 엘리베이터는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정말 공포스러운 것은 그것이 내 의지와 혹은 내가 누른 버튼과 무관하게 자기 멋대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한없이 아래로 내려간다든지, 한참을 위로 끌어올려지다가 툭..이라든지, 가끔은 올라가는지 내려가는지 알수조차 없을때가 있고.. 이쯤해서 꿈속의 내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공포의 클라이막스까지 가면 꿈이 끝난다. 잠에서 깨는 것은 아니지만, 뭐라할까, 그냥 내 기억은 항상 거기까지다. 한번도 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본 적이 없다.
이런 꿈을 그렇게 자주 꾸는 것은 아니지만 잊을만하면 한번씩 찾아오는 꿈이기도 하고, 이것 이외에 달리 반복적으로 꾸는 꿈이 없으니 아마 난 다른 것들에 비해서는 보통 이상으로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나보다.

가끔 공포영화에서 본 장면들이 불쑥불쑥 머릿속에서 되살아나서 갑자기 복도나 계단, 심지어는 방구석 같은데가 무서워지긴 하지만 내가 왜 엘리베이터를 무서워하는가에 대해서는 도무지 짚이는 바가 없다. 워낙 어릴때부터 꾸던 꿈이니 공포영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리라고 생각하지만.. 뭔가 무의식 속에 트라우마 같은거라도 있는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어린 마음에 그냥 엘리베이터가 무서웠던 것일까.. 그런거라면 그게 이렇게 크고 나서까지 똑같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걸까

숙제 : 당신의 악몽을 적어 보세요.

잡담, 일상* 악몽, 엘리베이터
2007/06/04 05:01, mari.

  1. 낙화 2007/06/04 11:46 Delete Reply
    내가 꾼 최초의 악몽은.. 바퀴벌레가 날아와서 내 얼굴에 붙는 꿈.

    가끔 꾸는 악몽으로는..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나는 죽고..

    나외에 이미 몇사람 죽어있고 같은 공간안에 숨어 있는데

    그 누군가가 나를 발견하고 죽기 일보직전에 깨버리는 평범한 악몽[..]
    • mari 2007/06/04 20:25 Delete
      숨거나 쫓기는 꿈은 진짜 무서워요; 자고 일어나도 잔것같지 않고.. 그나저나 전 꿈에서 죽은 사람을 본 적은 거의 없는거같아요.
  2. 해슬 2007/06/04 11:51 Delete Reply
    친구들이랑 집안에서 불을 끄고 술래잡기를 하다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화장대 옆에 있던 형광등 스위치를 올렸는데 불을 켜고 보니 화장대 거울 위에서 진짜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마녀처럼 무섭게 생기고 뾰족한 마녀모자를 쓴 마녀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어요.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아예 학교도 들어가기 전, 그러니까 까마득히 어릴때 꾼 꿈인데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답니다. 어린 마음에 어찌나 무섭던지 ㅡ.ㅡ
    • mari 2007/06/04 20:36 Delete
      오랜만이에요 해슬님~
      전 이 엘리베이터 악몽 빼고는 악몽을 꿔도 금방 잊어버리는데, 이렇게 오래 기억하고 계실 정도면 정말 무서우셨나봐요 ㅠ.ㅠ
  3. 주성치 2007/06/04 14:12 Delete Reply
    악몽의 최고봉은 역시 재입대 꿈아닌가?

    다른 악몽들은 이제 다 버로우했음
    • mari 2007/06/04 20:22 Delete
      그렇겠네요(..)
      악몽은 악몽으로만 끝나기를..
  4. 늑대 2007/06/05 00:05 Delete Reply
    나도 엘리베이터 악몽 몇번 꾼 적 있어. 내가 원하는 층수 없다는 점 공감..
    나는 층 표시 계기판이 미친듯이 올라가면서 엘리베이터도 급 가속 한다거나,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에 탔는데 갑자기 토이 크레인 같은데 매달려서 빌딩 주위를
    뱅글뱅글 도는 꿈... 기절할 뻔 했음. 하지만 내가 꿨던 최고의 악몽은 군입대 전에
    미군을 때려죽여서 (...그때 한참 반미 분위기 였던 탓인지) 우리나라 법정에 서지도
    못하고 바로 미국 법정에 끌려가서 즉결 총살 당하는 꿈..
    이 꿈얘길 남에게 할때면 난 언제나 괴리감을 느껴. 정말 무서웠는데 그 감정을 오롯이 전달할수가 없어서.. - _-; 솔직히 좀 웃기잖아
    • 주성치 2007/06/09 02:47 Delete
      내가 대신달아줄께
      ......
      내꿈꿔
    • mari 2007/06/11 01:31 Delete
      성섭선배 감사..
  5. 굘님 2007/06/05 00:24 Delete Reply
    괴물 한마리에게 미친듯이 쫓기다가 결국 다 죽고 나 혼자 살아남아.

    배경은 늘 고등학교 건물.
    • mari 2007/06/05 00:25 Delete
      넌 살아남는데 왜 악몽이야..?
  6. mizho 2007/07/25 11:07 Delete Reply
    난 누군가가 날 죽이려고 쫓아오는 꿈이 제일 무섭던데..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걸 느끼면서 미친듯이 달려 도망가는 꿈..
    거기다가 꿈 속에서 이게 꿈이구나, 라는 걸 알면서도 깨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는 모습이 보기 싫기 때문에 계속 달릴때..
    그 악몽, 한창 키클때 많이 꿨었어;ㅋㅋ
    • mari 2007/07/28 14:02 Delete
      난 쫓기는 악몽은 그렇게 많이 꾸진 않았는데 그래서 키가 잘 안컸나봐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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